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엘 2세 (문단 편집) === 통치 === [[파일: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jpg]] 1910년 5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마누엘 2세 본인''', [[독일 제국]]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왕국|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1908년 2월 1일, 아버지 카를루스 1세, 어머니 아멜리 왕비, 형 루이스 필리프와 함께 빌라 비소사에 [[사냥]]을 떠났다가 리스본으로 귀환하던 마누엘은 갑작스러운 [[카를루스 1세 암살 사건|암살극]]으로 인해 아버지와 형을 잃고 본인 역시 팔에 부상을 입었다. 마누엘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추가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파초 다스 니디다데스 궁전에서 엄중한 경비를 받았다. 1908년 2월 2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국무회의를 주관한 젊은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통치하기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그가 내린 첫번째 지시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구축해 민심을 요동시키고 아버지와 형을 제대로 경호하지 않은 주앙 프랑코 페레이라 핀투 내각에 사임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후 새 총리에 선임된 프란시스쿠 페레이라 두 아마랄은 진보당과 개혁당 인사들을 골고루 포진시킴으로서 행정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의회를 정상으로 되돌렸으며, 정치범들을 해방하고 공화당의 언론 자유의 보장, 카를루스 1세 암살 주동자들의 묘소에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책은 들끓어오르던 포르투갈 정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실과 정부가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1908년 5월 6일, 마누엘 2세는 의회를 소집한 뒤 의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아버지의 국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으니 앞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에 따라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회 문제"라는 한 가지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마누엘 2세가 지목한 사회 문제는 [[산업 혁명]] 이래로 도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가중되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왕실의 안위가 흔들리는 상황을 의미했다. 산업화가 미약한 포르투갈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별로 강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경제 위기에 편승하여 점점 세력을 불리는 공화당에 상당한 사회주의자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누엘은 공화당과는 양립하기 어렵지만,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공화당과 사회당이 서로 갈라서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1909년, 마누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푸앵카레]]를 포르투갈로 초대해 포르투갈의 실정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 푸앵카레는 포르투갈 전역을 여행하며 실태를 확인한 뒤, 마누엘에게 광범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지역 정부와 행정을 재편하고 정치 개혁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왕은 이 조언에 고무되어 1909년 6월 각료회의 의장인 벤체슬라우 데 리마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사회당이 아퀼레스 몬테바르데의 지도 아래 통합된 것을 이용해 몬테바르데와 접촉해 정권과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노동계급을 공화당으로부터 우리 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유용하고 생산적인 힘이 될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후 왕과 아퀼레스 몬테바르데간의 서신이 연이어 교환되었다. 1910년 7월에는 국립노동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3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몬테바르데가 위원회가 효과적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왕은 공공 사업부 장관을 통해 정부에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국왕에게 호의를 표했지만, 이 정도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공화주의자들을 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누엘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고 각국의 수장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의 확실한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공주와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카를루스 1세가 암살된 일에 깊은 경계를 품고 공주를 보내기를 주저했고, 결혼 협상은 장기간 지연되다가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마누엘 2세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해 영국의 새 국왕 [[조지 5세]]에게 위로를 전하며 포르투갈을 계속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그의 통치 2년간 7개의 내각이 수립되었다가 해산되길 반복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개혁당과 진보당은 서로간의 심각한 갈등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공화당은 갈수록 강해져 1910년 8월 28일 선거 결과 9%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14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개혁당과 진보당이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로 정권을 차지할 가망은 없다고 여기고, 혁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